낮은 사물들로써 세워진
추상적 조각의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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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실 비평가 (아트플러그 성과 보고전 2022.2)
집안의 물건들 세우기
전장연이 30대로 넘어갈 즈음 평면(회화)에서 “조각”으로 매체를 바꾼 것은 우연한 사건에 기인한다. 장연의 작업에 일대전환기가 되었던 2011년 전시 <멈춰선 것들>은 동전, 플라스틱 머리띠, 물병 뚜껑, 백열전구, 렌즈와 같은 동그란 형태의 사물들의 한 부분을 갈아서 주르륵 세워놓은 전시였다. 구르다가 쓰러지는 사물들에 지지대를 수여함으로써 사물의 형태를 수정하고, 그것들을 조각‘처럼’, 조각으로써 전시장으로 끌어들인 실험에서 장연은 “발에 채이기 쉬운 작은 사물들이 일어서서 주목을 끌 때 적지 않은 희열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일상적인 용도뿐인 물건들에서 조형적 유사성/공통성을 발견하고 하나의 범주로 묶고 거기에 걸맞는 지위를 수여하는, 개념미술적이거나 아방가르드적인 실천을 통해 장연은 일상과 예술, 기능적 물건과 미적 사물의 이분법을 또 허물었다. 작가 자신의 집안의 물건일 저 동그란 오브제들/사물들의 평범함의 ‘고유한/적절한(proper)’ 지위를 놓고 사유하고 감각하기.
저것들은 동그랗고 굴러다니고 “발에 채이는”, 다시 말해서 걸리적거릴 뿐, 상품으로써 값이 나가거나 사물로써 취약하거나 기념물로써 소중한 것들이 아니다. 저것들은 구석으로 밑으로 틈으로 사이로 쓸려 들어가 먼지처럼 잊히는 것들이다. 사고 잊고 또 사고 찾아보면 여러 개가 한꺼번에 보이는 ‘낮은(low)’ 물건들이다. 집안의 물건들의 위계 속에서 바닥을 차지하는 것들이다. 장연의 주목과 발견, 개입과 변용의 특수함은 이렇듯 그녀가 발견한 물건들, 사물들이 더 사소하고 더 무의미하고 더 아래에 있는 것들이라는 데 있다. 일상을 발견하고 미술관으로 옮겨오는, 역할과 기능의 전환이나 낯설게하기는 동시대 미술에서는 흔한, 자주 사용되는 기술이다. ‘예술’의 생존이나 이후의 삶을 책임지는 일상적 오브제들의 미적 전용/변용에서 장연의 사물들, 물건들은 더 주변부적이고 더 비가시적인 것들이다. 설사 특수한 사물들에게 비춰지는 전시장 조명 아래에 놓이게 된다고 해도, 장연의 낮은 사물들이 잘, 정확히, 크게 읽히거나 전달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소한 사물들과 사소한 위반, 그러므로 “적지 않은” 희열을 초래한 실험은 남들의 이목이나 관심을 즉각적으로 끌지 않을 것이기에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오고 가는, 보고 잊는 관객들 사이에서 마치 잔상이나 에코처럼 살아있을 수 있는 끈질긴 존재, 사유, 태도의 실험이다.
(뒤샹이 변기용품을 파는 상점에서 자신의 변기를 발견한 것처럼 여성(주의) 작가들은 집안에서 자신의 대안적, 위반적 오브제나 가설들, 장치들을 발견했다. 장연이 자신의 집에서 꺼내온, 장연의 자아의 미적 은유로써의 낮은 사물들의 조각적 변용은 예술에 대한 정치적 말걸기로서의 여성주의적 실천과 추상적 조형성의 물질적 담지자로서의 규범적 조각의 이념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려는, 치우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통해 일어난다.)
장연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상태, 혹은 힘을 나누어 기대어 있는 상태, 혼자서는 오롯이 서기 어려운 감각을 보여주는 것”에 더 집중하려한다고 적었다. “기대어 있거나, 쓰러지기 쉽거나, 힘주어 서 있거나 하는 것이 안전하거나 온전하지 않은 삶의 상태와 더 가깝고 솔직하다고 느낀다”는 장연의 문장은 독립, 자유, 자율과 같이 예술가-개인주의에도 영향을 준 (근대적)자유주의의 이념과는 거리를 두려는, 제대로/잘 서 있을 수 없는 물건의 조각적 변용으로 번역된 취약한 유기체들의 생존방식을 압축한다. 나타나자마자 눈에 띄고 각광을 받는, 그런 강한 존재들과는 조금 거리를 둔, 바닥에서 구르거나 쓰러져 있어서 “발에 채이기 쉬운 작은 사물들”에게 조명을 쏘이려는 행위의 가치는 길고 오래가는, 가늘고 긴 삶이나 그런 삶의 비유들, 스타일들을 이미 이해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나는 장연이 이번 아트 플러그에서 입주 작가들을 위해 진행한 글쓰기 수업에 제출한 문장들이 문장가, 에세이스트로서의 장연의 능력을 증명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연의 에세이는 행간, 여백에서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 글이다. 장연이 자신의 물건들, 더 무의미한 것으로써 그러나 조형적으로는 가치를 갖는 물건들을 집안에서 미술관으로 끌어들여 주목하게 했던 것처럼 장연의 문장들 역시 그렇다.
지금 여기 일상의 미적 변용
이번 인천 아트플러그 레지던시 입주는 이제 어린이집에 갈만큼 성장한 딸 태린의 양육에서 비교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장연의 주부생활에서의 변화와 연동한다. 집에서 한 시간 운전을 해야 도착하는 아트플러그에서 그러나 장연은 독립된 공간 안에서 자신이 끄적거린 스케치(이미지, 도형)가 전시에 나타날 추상적인 조형성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태린의 그림, 도형들, 가령 태린의 원형, 별, 무지개를 복기하고 반복하고 있음을 목격했다고 썼다. 가볍고 사소해서 어디서든 “발에 채이는” 오브제들, 사물들은 “아이가 자고 있는 이 고요한 시간을 무식하게 찌르는 별의 모서리”처럼 작업을 위한 의자에 먼저 앉아 있거나, 아트플러그의 작업실도 장악한 것이다. 물리칠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에코처럼 유령처럼 자신의 몸과 무의식을 장악한 태린의 물건들, 이미지들, 도형들을 인정하면서, 장연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식성”, “하트와 별,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것, 사랑스러운 것, 귀여운 것”을 탐내는 마음이 곧 작가인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는, “필수적이기 보다는 불필요하기 일쑤인 장식”으로써의 예술이 곧 자신의 예술론임을 인정한다, 고백한다.
이번 입주 작업의 결과 보고전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에 제출한 네 점의 조각 중 <낮은 무지개>는 딸의 일상, 이야기를 조형적으로 변용, 구축한 것이다. 형형색색의 시각적 환영인바 먼 곳의 무지개는 주문공정으로 전해받은 단단하고 차가운 철판 사이에 숨어 있다. 제목으로 표지된 무지개를 보려면 조각적 사물 가까이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거나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서, 태린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여러 장의 철판은 미세하게 벌려져 있고 그 사이에 역시 사물이고 오브제인 민트캔디와 동전이 있다. 그리고 철판을 벌리는 데 이용된 것인지 벌려진 철판 사이에서 보여져야 하는 ‘바로 그것’이어서인지, 수단인지 목적인지 불분명한 사물들 사이로 무지개 색이 보인다. 어른들의 감상법에 다름 아닌 관조는 구석이나 시시한 것에 주목하는 아이의 호기심이나 자세를 취해야하기에 불가능해지고, 올려다보기 마련인 무지개는 구석 하단에 조각적 형상에 숨어 있다. 장연의 집(구석)에서 장연의 가방에서 옮겨졌을 것이 분명한 캔디나 동전이, 틈으로 떨어지거나 사라진 물건들이 각자의 기억이나 몸에 각인된 이야기를 시작한다(돌아가신 외할머니댁 마룻바닥으로 또르르 굴러들어간 삔, 동전, 연필 같은 것을 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워하고, 찾고 있다. 그 집은 이미 무너졌지만 나는 여전히 할머니 집 마루 틈새에 눈을 들이댄 소녀이다). 장연의 조각은 시시한 것들이 굴러가고 사라지고 겨우 보이고 갑자기 중요해지고, 시간 속에서 상실 속에서 절대적 대상이 되어가는 욕망의 구조를 복기하고 실연하고 증언한다. 태린이 주인공인, 장연이 대신 전해주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작고 사소한 스토리 없이는 우리는 현재를 견디거나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에게서 멀어졌음을 견디거나 이겨야할 태린은 이 작품을 보면서 눈에 안 보여도 마음은 보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예술가 엄마와 ‘장식쟁이’ 태린의 무언의 대화, 사랑, 인정, 기다림.
딸의 머리를 아침마다 묶어주는 엄마들의 손의 행위를 모방하고 복기하는 <Circle Bonding>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유기체처럼 만들고 세우는 조각가와 딸을 일으키고 장식하는 엄마의 유비, 유사성이 암시적으로 작동한다. 조형적이고 장식적인 이미지나 도형을 만드는 엄마와 딸의 ‘평등’, 유대가 감지된다.
한 사람의 영향이나 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만든 작품들이 결국 ‘보편적인’ 반응이나 공감을 일으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랑의 사소함, 일상성이 미적인 것을 이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 ‘우석’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추상적이고 조형적인 조각의 특수성 안에서 스토리가 작동하는, 단단하고 견고한 철판 속에서 담배꽁초와 무지개가 제 사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시 낮고 작은 조각 <휴게 Break Time>가 있다. 이제 장연은 마흔이 넘은 중견/본격 작가의 위치에 있고 어린 딸을 건사하는 엄마이자 주부이다. 장연의 고등학교 동창인 우석은 “연극인과 영화인 어디쯤의 객기”를 품은 채, 마을버스 운전으로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다. 자식을 키우면서 ‘자아-실현’ 혹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우석은 장연에게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이미지이다. 장연은 고등 동창들의 단체 카톡에 우석이 올린 무지개 사진과 그가 그때 피웠을 게 분명한 담배 꽁초를 소재로 중년의 예술가들, 암중모색 중인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의 밸런스를 형상화한 조각을 만든 것이다. 벽이 지지대인 이 작은 조각의 안에 숨은 팔주노초파남보의 존재는 담배꽁초에 의해 겨우 보여진다. 곧 사라짐은 무지개와 담배(연기)의 속성이지만 철판에 칠해진 무지개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 차갑고 단단한 철판을 감당하는/육박하는 담배(꽁초)의 물질적 힘이 철판이 닫으려는 무지개 색의 증언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직 혹은 당분간 혹은 영영 전업작가일 수 없는 이들이 장연의 직관하듯이 “안전하거나 온전하지 않은 삶의 상태”의 바로 그 형상, 위치 중 하나라면, 친구의 이야기와 자신의 형식을 버무려 불안정한 예술가의 삶과 꿈을 긍정하는 장연의 작업, 작품의 당대성이나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태린이와 친구에게서 전해 받은 것을 갖고,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딸들에게 불안정한 동료 예술가들에게 그러므로 관계 속의 우리와 꿈을 꾸는 우리에게 계속 하라고 계속 가라고 응원하고 있는 장연의 환하고 동그랗고 곡선인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