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적, 사진적
 

-김정현 미술평론가 (  Spiral Movement 전시 비평글 20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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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소식도, 심난한 뉴스도, 스팸 문자조차 한통 날아오지 않는 하루를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지루하다고 해야 할까. 난파선에서 구조되어 한숨 돌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순간의 시간에 영원의 감각을 부여할 테고, 별 일 없는 일상의 다행함이 익숙한 일상이 된 자들에게는 변덕스럽게 비극적 취향이 깃들기도 할 것이다. 머릿속에서 팽창하는 지루함이 손끝과 발끝까지 내려와 마비가 올 때쯤 용케도 자리를 박차고 거리로 나간다.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도시의 풍경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반복적인 재방송과 긴급한 사치의 홈쇼핑 광고로 번잡하게 돌아가는 수 백 개의 케이블 채널이 한꺼번에 펼쳐진 것처럼 복잡하다. 그리고 지루하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카드를 긁는다. 커피 한잔에 4,600원을, 메이크업 조각 스펀지 묶음에 8,010원을, 90일분 콜라겐 영양제에 29,900원을. 이런 식의 소비는 일상이 되었다. 매일 커피를 마시고, 매일 멀티 샵이나 인터넷을 뒤져 필요를 만든다. 프랑스 철학자 코제브가 50년대 미국에서 마주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사회의 충격은 반세기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전 지구적 대도시의 삶에 대체로 편안하게 흡수되었다.

전장연의 <2인용 테이블>(2014)과 근작 <낯빛(色面)1>(2021)의 사이에는 7년의 간격이 있지만 일상용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일관성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일상적인 물건들”에 자꾸 눈이 간다는 작가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풍경 속에 내재한 미묘한 불안감을 포착한다. 아니, 관찰자의 시점에서 냉정하게 포착한다기보다는 그 안에 속한 자로서 어느 날 문득 위화감을 느끼는 편에 가까워보인다.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변화해 소비문화의 첨단에 서있는 서울에 다시 돌아왔을 때, 추상적 언어를 탐구하는 작가의 삶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에서 상투적이나마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세속적 삶 사이의 경계가 감지될 때,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 Uncanny)’이 엄습한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른다면 이는 언제나 친숙한 것이었다가 억압 기제에 의해 낯선 것이 된 것으로, 죽음, 시체, 죽은 자의 생환이나 귀신과 유령 등에 관련된 것이다. 작가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에서 소재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어두운 낯빛을 가려주는 화장이 작가 개인의 맥락에서 어떻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는지 밝혀내는 일은 심리분석가에게 맡기자. 여기서 그보다 중요한 건 그의 실존적 불안과 창작적 매혹이 이중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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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 세우기. <2인용 테이블>에서 커피 테이블의 대리석 상판을 그대로 가져와 다른 재질의 판들과 마주 쌓고, <낯빛(色面)1>에서 색조 화장품을 바른 나무판 여러 장을

절묘하게 포개어 벽에 기울인다. 요소 간의 연결을 통한 단단한 구조의 창조는 오랫동안 조각의 이상이었으나, 모듈의 연결을 생략한 칼 안드레의 시도나 그렇게 분리된 요소들 간의 균형과 응축된 힘을 추구한 리처드 세라의 작업은 조각의 새로운 전환점을 표시한다. 전장연의 조각은 구조적으로 세라의 초기작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요소를 접착하지 않고 세우는 작업에 대한 관심은 미술사의 참조나 차용보다 개인적인 관심에서 먼저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장연의 초기작인 <멈춰선 것들>(2014)에는 알약이나 동전만한 크기의 작은 사물이 테이블 위에 옹기종기 서있다. 수집한 사물의 밑을 갈아서 조심스럽게 세워놓은 것이다. 무겁고 거대한 재료를 다루는 작업에 대한 부담은 자기 신체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재료를 한정하게 했다.

곧바로 두 가지를 번복하려고 한다. 첫째, 전장연의 조각은 재료(material)가 아니라 사물(object)로 이루어진다. 사물을 세우기 위해 바닥을 살짝 갈아서 평평하게 만들거나, 신작에서는 심지어 나무판에 색조 화장품을 덧입히는 비교적 과감한 개입까지 나아갔지만 작업 언어의 초점은 여전히 재료의 물성을 탐구하는 것보다 수집한 사물의 배치에 있다. 둘째, 요소 간의 구조적 지지라는 세라의 주제를 초과하는 긴장감이 있다. “긴장감 있는 형태”에 대한 관심은 절묘한 균형 못지않게 무너지기 쉬운 상태의 조각을 낳는다. 세라가 여러 개의 평면 모듈을 맞대어 세웠다고 한다면, 전장연은 그렇게 맞닿은 평평하고 넓적한 사물들 사이에 카드 영수증이나 메이크업 스펀지 조각과 같은 사소한 물건들을 끼워 넣는다. 면적이 넓은 단단한 재료로 변화무쌍하게 만든 무대에 작고 가벼운 재질의 사물이 출연하여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즉, 재료의 모듈이 아니라 사물의 연극을 연출한다.

<숨을 고르고, 정지>(2020)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불안정한 지지대와 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사물의 조합은 이번에는 운동기구의 구조와 운동용품의 기호를 빌어 나타난다. 스테인리스 철봉이나 매트와 같이 피트니스 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 위에 맛사지 볼이나 라텍스 밴드가 저울의 수평을 맞추듯 절묘한 위치에 걸린다. 특히 이 작업에서는 모든 구조가 스프링에 걸려 천장에 매달려있다. 잔뜩 늘어난 스프링은 그것에 매달린 물건의 무게를 짐작하게 하거나 가벼운 충격에도 흔들릴 수 있는 운동성을 지닌 사물이지만, 작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천장 거치 구조가 전적으로 스프링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왼쪽에 쇠사슬을 함께 매달아 오른쪽에 스프링이 늘어난 높이를 고정한다거나, 바닥에 세운 안전봉과 높이를 맞춰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다. 따라서 매우 드문 확률로 관람객이 조각에 강한 힘을 가하지 않는 이상 스프링은 흔들리지 않고, 라텍스 밴드는 벗겨지지 않고, 공은 굴러가지 않는다.

스프링이나 라텍스 밴드와 같이 분명히 힘이 가해졌으나 정지된 상태로 구축된 작업. 오직 픽션으로서만 붕괴를 암시할 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도록 미묘하게 장치를 마련해두는 제스처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 전시작은 아니지만 작가는 <균형잡기>(2014)라는 작업에서 벽에 기댄 유리판 사이에 비타민 알약을 끼워 넣는 설치를 하면서, 습도와 유리판의 무게 등의 이유로 알약이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짜 알약 대신 석고로 만들어 채색한 가짜 알약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는 재료가 아닌 파운드 오브제를 조각 언어의 바탕으로 삼는 작가의 방법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든 백화점 디스플레이에서든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거치 구조를 구상하는 것만큼, 개별 사물의 속성의 차원에서도 일상적이거나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 무겁고 거대한 재료 대신 그럭저럭 혼자 다룰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변형되거나 바스라지기 쉬운 재료의 물성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일상 기물을 도입하여 소재로부터 모종의 의미가 발생하도록 하지만, 그것의 현실주의적 의미(만)를 내용으로 삼지 않는다. 현대 소비사회의 물신주의적 욕망을 비판하기 위해서(만) 소재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전장연의 작업은 무엇보다도 구조가 무너지기 직전의 시간이 응고된 순간을 역설적으로 견고하게 재현한다. 그런 면에서 전체 작업 중 유일하게 자연지물이 등장하여 소재주의적 해석을 배제하는 <몸짓 드로잉>(2021)은 상징적이다. 2015년 목가적인 자연 환경에서 생활하며 도시에 없던 정적에 낯설음을 느꼈던 작가는 적막을 깨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갈고리형 손잡이를 쥐고 창문을 열려는 한쪽 손의 손등에 작은 돌멩이가 얹혀 있다. 멀리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조그맣게 울리는 오래된 건물의 서늘한 실내에 이내 요란한 파문이 일 것 같다. 그러나 죽은 시간은 소리가 없다. 고요하게 얼어붙은 전장연의 ‘조각적인 풍경’은 사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