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난  Heavy Orchid
2024


전시보기 


일상은 수평적이다. 그것은 완만하고 위계 없는, 균질하게 반복되는, 사건 없는 시간의 연속으로 인지되곤 한다. 그러나 우린 그 수평성이 무수히 많은 레이어의 중첩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다. 일상은 납작하기보다 입체적이며, 일상을 채우는 순간들은 제각기 두께와 무게, 움직임을 갖는다. ‘입체적 수평성’이란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처럼 들리지만,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에 이미 수많은 순간과 경험들이, 도시와 사물들 그리고 인물들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수평성의 세계로부터 울퉁불퉁한 입체를, 그것의 무게를 가늠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일상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전장연 개인전 《무거운 난》에서 일상의 수평성과 입체성을 포착해본다. 작업은 일상에서 작가가 본 것, 만진 것, 경험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말 그대로 하루를 지나며 반복되는 경험과 장면들이 전시를 채우는 것이다. 카펫이 넓게 깔린 전시장에는 얼핏 단조롭게 보이는 얇은 철 조각/면들이 부드럽게 휘어진 채 직립해 있다. <어제와 오늘>(2024), <난치는 사과>(2024) 등은 수많은 일상적 사건에 ‘차이들’이 잠재하는 모양으로 ‘가변적 평평함’을 드러내며 전시장에 솟아 있다. 그것은 육중한 기념비를 추종하지 않는 수직성으로, 정지된 평온함을 따르지 않는 수평성으로 구성된다. 작품은 공기의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고 움직이길 반복한다. 수평성과 수직성의 병치, 또는 정지와 움직임의 교차는 앞서 언급했듯 “진정한 일상의 감각”―여러 경험과 사회적 환경, 관계가 복잡하게 조직되는 것―을 느끼게 한다.

같은 맥락에서, <시장가방>(2024)과 <손에든 무게>(2024), <두부한모>(2024) 등에서 무언가를 들거나 당기고 있는 신체를, 시장이나 마트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이 일상의 장면에는 수평과 수직의 세계가 교차한다. 늘어선 세계를 돌아다니는 존재들에게 다층의 시간과 공간, 자기 성찰, 그리고 사회에 관한 사유가 더해진다. 작가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걸어가듯 특정 사물―예를 들면 무언가가 담겨 있는 비닐봉지, 과일, 생수 묶음 등―을 얇은 철 조각/면들에 더한다. 여기서 ‘더하기’는 단순한 추가 이상의 균형과 긴장을, 미묘한 어긋남과 움직임을 생성해낸다. 사물들은, 작가가 아침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일과를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장을 보는 등의 행위와 순간을 경유한다. 주물을 뜨거나 석고붕대를 감싸 만들어진 오브제들은 단순한 소비/경험의 흔적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행위와 공간들을, 그날들을 능동적으로 재해석하고 구성한 증거물일지도 모른다. 얇은 철판에 더해진, 그만의 긴장과 상황을 만드는 사물들은 특정 기능이나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자율적인 탐험의 과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1) 이를 통해 관객은 마치 도시를 산책하듯,2) 또 다른 인물의 일상적인 날들에 가담하게 되지 않을까. 전시는 그 자체로 일상과 도시의 여러 순간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상상하는 장소가 된다.

다시 사고되는 수평의 시공, 잠재적 일상의 전환지로서의 전시는 특정한 창작의 태도를 관통한다. 전시는 단단한 철판을 유연한 물질로 인식시키고 사소한 사물의 시각성을 병치하는데, 작가는 그러한 작업의 방법과 표현을 과거 문인화에, 특히 사군자의 ‘난치기’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밝힌 문인화적 태도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더 이상의 유효함을 탐색할 수 없다 여길 구태의 방식은 작가의 작업에서 어떻게 적용/재구성되고 있을까.

먼저, 문인화가 자연 대상을 이미지화하는 방식을 당대적으로 변용하는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전장연은 현대 도시의 풍경을 문인화의 표현 방식을 차용해 그만의 시각적 어휘로 풀어낸다. 사군자 묵법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곡선과 직선의 조화, 그리고 먹의 농담을 통해 만들어내는 강약의 리듬감은 작업에서 유동적인 선과 곡선의 3차원적 조각으로, 그에 더해지는 사물들의 구성으로 변환된다. 여기서 도드라지는 조각/사물의 여백은 거리를 두고 자연을 관조하며 그로부터 관계를 탐구하는 문인화적인 태도로 볼 수 있다. 전시/작품의 상당 부분을 비워둔 작가는 문인화 식 여백의 개념을 현대미술의 문법으로 재해석하는 듯하다. 전시는 단순히 비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기보다, 과거 방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형태와 색을 새로이 탐구한 결과를 드러내고, 비어있으면서 동시에 채워지는 가운데 주어진 대상을 넘어서는 기억과 사유를 마주하게 한다.

‘난치기’의 즉흥적인 붓과 먹의 사용을 닮은 작품은, 함께 포착된 자연적인 모양은 일상의 감각과 사고를 다각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주변 환경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이는 조각들은 과거의 문인화가 연잎의 미묘한 움직임이나 대나무의 흔들림에서 시간의 감각을 포착했듯 흘러가는 오늘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장면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전시는 긴 호흡의 보기를 전제하면서 다른 세계와 방식을 상상하길 제안한다. 그렇게 작가는 순간의 목격과 기록에 그치지 않은 시간성의 드러남을 의도하지 않았을까. 계속되는 순환 속에서도 변화하고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작품들은, 자연과 시간에 대한 전통 회화의 접근 방식과 사유를 오늘의 시공에 겹쳐놓으며 또 다른 물질과 사물로 재구성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태도와 방식을 두고 ‘전시가 일상을 미화하는 것은 아닌가’라며 질문할지 모른다. 어느 실존주의자는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부조리나 허무함을 떠올리며 전시에서 그것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고, 혹은 반대로 저 조각/사물의 무게가 삶의 고단함을 가리킨다고 우길지도 모른다. 전시는 단조로운 일상 안에서 반복적인 삶을 무조건 긍정하지도, 실존주의적 고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상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실천적 언어라 할, 무의미를 재고한다. 작업은 반복되는 하루를 겸허히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관계가 함께함이 드러난다. 전장연은 일상의 순간들, 그 안의 사유와 현실적 문제들을 단순히 지우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나름의 방식으로 의미를 찾고 거듭해서 이미지를, 물질과 사물을 포착한다. 이는 현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감각하는, 심지어는 극복하는 행위가 아닐까. 일상을 수직과 수평으로 교차하며, 과거의 방식과 당대적 풍경이 포개지는 전시의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거운 난》은 단정 지을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전시가 말하는 일상의 모습은 쉽고도 어렵게 자리한다. 넓게 퍼져 있기도 위로 솟아 있기도 하다. 단단한 동시에 얇고 강하며, 정지된 채로 움직이길 멈추지 않는다. 분명한 대상과 형상을 드러내면서도 그 감각과 해석에는 엄청난 차이의 가능성을 남겨 놓는다. 이러한 전시의 모습은 그것이 대상으로 하는 일상과 닮아있다. 《무거운 난》을 이리저리 걸으며 무수히 많은 관계를 찾아보는 것은, 어쩌면 오늘의 가능성을 축소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글 _ 권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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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을 참고. 미셸 드 세르토(신지은 옮김), 『일상의 발명 – 실행의 기예』 (문학동네, 2023).
2) 발터 벤야민은 19세기 파리의 근대 도시 경험을 바탕으로 ‘산책자 Flâneur’ 개념을 제시했다. 벤야 민은 이를 통해 목적 없이 도시를 유랑하는 데서 발생하는 근대적 경험을 상정하고, 걷기의 의미를 산출했다.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고. 발터 벤야민(조형준 옮김), Flâneur, 『도시의 산책자』 (새물결, 2008).

사이(pause)와 가변의 조각들 
(2024 고양 창작 레지던시 비평글 ) 

-최희승 큐레이터



일시 정지된 풍경

여럿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약속한 듯 멈춰 선 순간, 셔터가 작동하고 흩어지기 직전의 상태에 비유해 본다면 적절할까. 모인 사람들이 서로 낯선 사이라는 설정을 덧붙여서 말이다.[1] 전장연의 최근 작품들은 주로 설치나 조각의 형식을 지니며 철판이나 철골 구조, 스프링, 패브릭 등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앞선 비유와 같이 하나 이상의 개체가 공간 속에서 일정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통해 정지된 긴장의 장면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징적인 것은 ‘긴장’이라는 뾰족함을 위한 전장연의 조각은 과도하게 목적을 유지하려 애쓰거나 마지못해 견디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치 불안정한 상태를 자주 겪어 일상적인 것이 되었거나 객관적인 상태에 도달했다는 듯 바닥과 벽을 지지하고 천장에 매달린 채 주어진 곳에 꼿꼿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전장연은 물리적인 몸체를 지닌 조각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긴장을 발생시키고, 동시에 긴장을 의도하면서도 균형의 순간을 꾀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 긴장이란 오랜 시간 경로를 달리하여 반복되어온 것이며 균형은 반대급부에서 삶의 궤도를 유지하는 힘에 가까운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가죽의 굳은살 같은 단단한 표면을 그의 작품 일부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육중한 금속 파이프나 철판 위에 과감하게 입힌 민트나 핑크, 라일락, 무지갯빛이 주는 경쾌함을 마주하기도 한다. 미루어 보건대 전장연이 작업에서 다루고자 하는 긴장과 균형은 일반적인 의미를 벗어나, 둘 사이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와 그 안에서 삶을 수행하는 과정과 방식까지 종합하는 개념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삶의 수행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면, 개인이 사회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맡게 되는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역할과 그것을 모두 잘 해내는 일이라는 개념을 포괄한다. 같은 맥락에서 전장연의 근작과 개인전의 제목인 ‘발끝으로 선 낮’, ‘숨 고르고 정지’와 같은 표현들은 직접 경험했거나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불안에 대한 작가의 직유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출산과 육아, 그로 인한 공백, 성장하는 아이에 대한 관찰 등을 직접적으로 작업과 연결시킬 만큼 실생활에서의 역할 균형잡기는 그에게 중요한 주제로 드러나고 있다.[2] 각각 다른 입장과 위치에서 본 많은 기억과 감각, 직관, 이미지, 행위와 같은 것들을 작가는 숨을 고른 뒤, 한자리에 모으거나 제작하고, 알맞은 자리를 지정해 주고, 장면을 만들어 타인에게 공개함으로써 현실의 사적 증거물들로 이루어진 광장을 만들어낸다.



끼어드는 사물들

매체를 다루는 데에 있어 전장연은 2011년 전후부터 기존의 사물을 작품의 오브제로  변형시켜 또는 그대로 사용하였고, 2020년 이후로 커팅 가공된 철판, 철골 구조, 메탈 링 등에 사물을 접붙이는 방식을 통해 조각의 형식을 구사해왔다. 회화를 전공한 그가 익숙지 않은 3차원을 자신의 장으로 선택하는 몇몇 이유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조각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인 신체의 사용을 가장 주요한 것으로 들고자 한다. 손을 사용하여 공간 안에 무게를 지닌 가시적인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작가에게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입체라는 형식이 지닌 특징 즉 공간을 인식, 전달하는 실질적인 방식이자 구현한 형태를 사진과 같은 2차 공정이나 편집 없이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것들을 사물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조건은 무엇인가? 우선 전장연은 사물에 절대적인 의미나 특수한 개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꽃꽃이 책을 참고하여 다발을 만들되, 꽃 대신 여러 가지 오브제를 즉흥적으로 조합시킨 초기작 <오브젝트 드로잉>(2011)에서 헤드셋, 샤워볼, 케이블, 전구, 딱풀, 일회용 수저, 헤어롤 등은 일상적인 오브제로서 모두 ‘꽃’이라는 명제를 따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멈춰 선 것들>(2011/2014)의 경우 머리띠, 동전과 백열전구, 화장품 케이스 등 크지 않은 사물이자 원래부터 설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작가는 밑면을 평평하게 갈아 세워두었다. 개별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당위보다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는 개체로서의 의미가 우위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멈춰 선 것들>과 형식적으로 유사성을 지닌 <광장>(2011/2014)에서 전장연은 사각형 판위에 주워온 시계, 거울, 휴대용 랜턴 등의 사물들을 배치하며 시위를 위해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여기서 또다시 자명종이 특정한 정치적인 인물이나 정당을 상징한다거나, 거울이 어떤 지위나 성별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는 전면이 불투명한 거울, 시침과 초침이 보이지 않는 시계와 같이 사물의 기능을 차단함으로써 처음의 속성을 잃어버린 시위대의 상황을 표현하였다. 신체로서 여겨지는 사물에 대한 극명한 예시로서 전장연의 2014년 사진 작품 <인테리어 제스처> 시리즈에서는 사진으로 기록된 사물의 형태를 대체하거나 모방하는 몸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전장연의 작업에서 사물이 신체라는 전제를 고정 값으로 둔다면, 가장 궁금해지는 부분은 작가의 표현으로 ‘끼어드는 사물들’이라고 일컫는 경우이다. 다수의 작품을 통틀어 작가는 화장 퍼프, 동전, 비타민 알약, 민트 캔디, 담배꽁초 등을 조각과 조각의 사이, 벽과 조각의 틈새, 면과 면이 만나는 접합 지점 등에 밀어 넣거나 작게 구기고 끼움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연출하였다. 뒤틀리거나 눌린 사물들의 모습에서 조각의 무게를 가늠하게 되거나 미세한 사이 공간을 인지하기도 하고, 끼어든 사물의 색이나 형태가 부각되기도 한다. 보는 사람은 압력이 되는 조각과 선과 면 사이를 차지하는 오브제의 모습에서 그것을 욱여넣었을 신체의 감각을 전달받게 되는데, 작가는 이와 같은 끼어드는 사물들이 조각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변수로 작용한다고 말한다.[3]

<숨을 고르고 정지>(2022)에서는 <광장>, <멈춰 선 것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사각형 프레임이 공간의 구조로 확장된다. 스케일이 커지는 것과 더불어 제작의 측면에서는 철골 구조와 스프링에 패브릭이나 로프, 라텍스 밴드 등을 덧입히고 접합하여 대부분의 조각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잠깐의 공백과 10여 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전장연의 타임라인 전체를 두고 작품 간의 연결고리를 바라본다면 일관적인 관심사와 작가적 태도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정표와 같이, 조각 어딘가에 ‘끼어드는 사물들’을 위치시키고 나아가 입체-조각의 풍경을 구축함으로써 그는 정지의 순간만큼 몸을 현실로 데려왔다가 이내 가변의 시공으로 내보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1] 김정현은 전장연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정지의 재현이나 형식을 두고 사진적이라고 언급한다. 김정현, 「조각적, 사진적」 , (2021)

[2] 여성 작가로서의 출산과 육아가 작업에 미친 영향과 변화는 양효실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양효실, 「낮은 사물들로써 세워진 추상적 조각의 스토리텔링」 , (2022)

[3] 전장연 작가 노트, 포트폴리오에서 발췌. 원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선과 면 사이에 끼어드는 사물들은 그 구조를 돕는 동시에 방해하기도 한다. 마찰과 무게에 의해 조각의 형태를 완성하기도, 동시에 변수가 되기도 한다.”





Sculptures of Pausing and Variability


- Choi Heeseung, curator



Paused landscapes



Would it be suitable to compare it to the moment when everyone has stopped almost to take a picture, just as the shutter is working and right before they go their separate ways again? I would add that the scenario here is one where the assembled people are strangers to one another.[1] The recent works of Jun Jangyeun have mainly been created as metal plates, metal-framed structures, springs, and fabrics that take on the forms of installations or sculptures. As the previous analogy suggests, they also tend to present scenes of suspended tension, adopting an approach where one or more individuals maintain a certain distance and relationship within space. The defining feature here is how Jun’s sculptures show no indication of excessive straining or compulsion to adhere to the goal of a pointed “tension.” As they rigidly occupy their given space, shoring up the floor and walls or dangling from the ceiling, it is as if they have so often experienced states of instability that they have become routine, or as if they have achieved some objective state.

In these ways, Jun creates tension in order to strike a balance among sculptures with physical bodies—yet even as she aims for tension, she also envisions moments of equilibrium. For her, tension is something that has arisen repeatedly over time through different pathways, while equilibrium can be seen as akin to a countervailing force sustaining the trajectory of life. This explains why in some of her works we encounter firm surfaces like callused leather, while we also see the brightness of the mint greens, pinks, lilacs, and rainbow colors boldly applied to her bulky metal pipes and plates. From what we can see, Jun’s approach extends beyond ordinary meanings associated with tension and balance; in her work, they are concepts that simultaneously encompass the complementary relationship between them and the processes and methods through which life is lived within them.

If we look more closely at the “life” described here, we see that it includes the multifaceted, three-dimensional roles that we take on as individuals in society who cannot live on our own, as well as the effective performance of those roles. Along the same lines, Jang’s recent work and the titles she has used for her solo exhibitions—Standing on Tiptoe and Pause, for example—may be read as her analogies for the various forms of anxiety that she has experienced in the past or faces today. In particular, the achievement of balance in her own personal roles appears as a major theme, establishing direct connections between her work and the experiences of bearing and raising a child, being sidelined from work as a result, and observing her child’s growth.[2] After a “pause,” the artist assembles or embodies the many memories, sensations, intuitions, images, and actions witnessed from different positions and perspectives; she designates the right spot, and by creating images to present to others, she forms public square settings out of evidence of a private reality.



Intercalated objects

In terms of her approach to media, Jun began transforming or repurposing existing objects as artistic ones sometime around 2011. Since 2020, her approach to sculptural forms has involved grafting objects onto cut metal plates, metal-framed structures, and metal rings. We can imagine a number of reasons that the artist—a painting major—opted for the unfamiliar three-dimensional realm, but the one I want to single out as most important is the use of the body, which is an inextricable part of sculpting. Jun appears to have discovered a validity in the process of using her hands to create a visible, weighty mass in space. She may also have made this choice because of the three-dimensional aspect: the advantage of having a practical means of perceiving and expressing space and of showing the resulting forms without editing or other secondary processes, as in photography.

So what are the things referred to as “objects,” and what are their conditions? To begin with, Jun does not assign any absolute meaning or special qualities to her objects. In her early work Object Drawing (2011), she creates a bouquet based on a floral arrangement book, but she improvisationally combines various objects other than flowers. The items here—a headset, a shower ball, a cable, a lightbulb, glue, a disposable spoon, a hair roller, and so forth—share the commonality in that all of them conform to the “flower” premise as everyday objects. In Stop for Standing (2011/2014), which was produced around the same time, the artist uses small objects (headbands, coins, incandescent lightbulbs, cosmetic cases) and items designed in such a way that they are incapable of standing on their own; after grinding down their bottoms to a flat surface, she places them in a standing position. The predominant sense operating there is not of the concrete imperative associated with individual objects, but of entities performing a given role.

Square (2011/2014), which bears formal similarities to Stop for Standing, has the artist positioning found objects (watches, mirrors, portable lanterns, and so forth) on a square plate, creating an analogy between them and people assembling on a public plaza for a demonstration. The alarm clock here does not stand for any particular political figure or party; the mirror does not denote any status or gender distinction. By foreclosing the object’s ordinary function—a mirror with an opaque surface, a clock with no visible hands—she expresses the state of a demonstration where the participants have lost sight of their initial characteristics. Clear examples of objects being treated as bodies can be found in Jun’s 2014 photography series Interior Gesture, which presents bodies replacing or mimicking the forms of objects recorded in photographic images. 

If the premise of the object-as-body is a fixed value in Jun’s work, the viewer’s curiosity is most piqued by what the artist herself describes as “intercalated objects.” In many of her creations, the artist has staged new situations with elements such as cosmetic puffs, coins, vitamins, mint candies, and cigarette butts, which she has stuffed in among the sculptures, between the sculptures and the wall, or in the spaces where surfaces come together, sometimes in tiny, crumpled form. At times, the twisted or compressed forms of the objects help us to gauge the sculpture’s weight or to perceive the tiny spaces in between; other times, the colors and shapes of the inserted objects are accentuated. From the viewer’s standpoint, the images of the sculpture applying pressure and the objects that occupy the space between line and plane convey a sense of the body that stuffed them inside. Jun has said that these inserted objects both complete the sculpture and function as variables.[3]

In Pause (2022), the square frames found in both Square and Stop for Standing are expanded into spatial structures. In addition to the larger scale, there is also a transformation in terms of the creation process, as Jun produced most of these sculptures by applying fabric, rope, latex bands, and other objects to metal-framed structures and springs. When we attempt to spot the connections across Jun’s body of work—despite the brief hiatus and passage of a decade—it is not too difficult to see the consistent interests and artistic stance. Like distance markers that are difficult to notice, the artist is positioning “intercalated objects” in her works and creating landscapes of the three-dimensional sculpture. While the body is transported into reality at the moment of pausing, it is soon sent out once again into variable time and space.








[1] Kim Junghyun has used the word “photographic” to describe the representations and forms of “pausing” that appear in Jun Jangyeun’s work. Kim Junghyun, “Sculptural, Photographic” Spiral Movement, exh. cat. (Anyang Art Council, 2021), pp. 102-104

[2] The effects and changes that childbirth and child-raising caused for Jun’s work as a female artist are effectively described in Yang Hyosil’s text. Yang Hyosil, “The Storytelling of Abstract Sculptures Stood Up as Low Objects” I Always wish you Good Luck, exh.cat. (Yeonsu Art Council, 2022), pp. 46-48

[3] Quoted from Jun Jangyeun’s artist notes and portfolio. The original sentences read, “The objects inserted between line and plane assist with the sculpture but also disrupt it. Through friction and weight, they complete the sculpture’s shape, but they are simultaneously variables as well.”

2024 고양 창작 레지던시 세미나  

-조주리 큐레이터





작업 설명을 살피며(들으며) 저는 알 수 없는 작가의 성장기와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로 진입하는 삶의 추상적 단편들과 조각적 사물, 혹은 사물 -조각으로 대변되는 어떤 형상 사이의 공명을 느꼈고 그 점이 자못 흥미로웠습니다. 외견상 느꼈던 전장연의 작업의 첫인상은 매우 섬세하고 감각적이고, 아주 절묘하게 세련된 편입니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나중에 깨달았어요. 

매끈하게 머리를 묶고, 굽높이가 다른 스틸레토를 신고 있는데,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짝다리를 짚고 있는 뉴요커 여성 같은 아찔한 감각이었습니다. 뭔가 팽팽한데, 애잔함이 있다고 할까요. 전체적으로 깔끔한 얼굴인데, 뺨에 큼지막한 먼지가 묻어 있는 줄 모르고 있는 모습같기도 했고요. 저는 그게 처음 아방가르드 패션을 추구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실제로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어떤 여성의 분주함이나 결핍, 두려움의 요소일 수도 있다고 뒤늦게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기획자와 작가로 오며가며 알고 지낸 지 삼 년 차 정도 되었는데, 작업에 담긴 상세한 서사나 감정적인 부분을 이렇게 자세히 들었던 것은 처음입니다. 관람객으로서 늘 작업의 외관으로부터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오늘부터 전장연 작가의 작업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합니다. 

더불어, 비슷한 시대를 공유해온 사람으로써 저의 일상 중 중요한 의미를 대리하거나,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을 붙이고 살아가야만 하는 어떤 사물의 형상과 그것들 간의 관계, 힘의 균형과 와해,  질감 같은 것들을 동시에 투영해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떤 가시적인 리얼리즘의 세계라기 보다, 조각적 관찰과 사고를 통해 매개되는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사물에 투영된 나를 다시 바라보고, 그것을 조각이라 부를지 조각적 상황이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작업이 은폐하고 있는 생활상의 서사나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성, 출산, 육아, 창작 이런 키워드로 좁혀 생각하기 보다는 크게 보아, 현대인이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을 조각적 발견과 사고를 통해 재사유하는 셈입니다. 여기에서의 사물이란 단순한 오브제 뿐만 아니라 조각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물질문화, 시각문화 안에서의 합의된 물성과 디자인, 현대미술이 규정하는 온갖 종류의 조형적 어휘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저희가 이번 발표의 제목을<조각, 조각적, 조각적 삶, 삶의 조각> 뭐 이런 식으로 해보자고 이야기 했었던 것 같은데, 최종 제목이 정말 허식이 없는 간결함과 담백함을 담고 있어서 좋습니다. 오늘의 자리는 미술에 대한 담론적인 접근이나 조각 매체 자체에 대한 해석이기 보다, 결국에 작업이 작가 삶의 어떤 부산물이라는 점, 그리고 반대로 자신이 선택적으로 배열하고 조작적으로 구축한 사물의 풍경이 실제 삶에 대한 재인식이나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는 점을 말하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몇 가지 궁금한 점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작업 설명에 있어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두 개념인 ‘정지된 추상’과 ‘서사적 조각’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숨고르고 정지’와 같은 최근 전시에서 ‘정지된 추상’과 같음 말들이 특히 직관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사적 조각’ 역시 앞서의 설명에서 잘 드러난 요소라고 생각되는데, 일반적으로 조각에서의 ‘서사’라는 것이 어떤 함의가 있을까요? 대상이나 상황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 창작자 개인의 서사나 생활에서 오는 감정들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라고 단순하게 이해해도 될까요? 한편으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조각들이 제각각의 방식으로 서사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작가노트에 아주 잘 기술되어 있는 것 같아요)



2.     원래 회화 작업에서 출발했고, 이후 조각 작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진 이미지를 함께 만들기도 했는데요. 평면 이미지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낯빛 시리즈 같은 경우는 절묘하게 평면과 입체 사이의 틈이라고 해야할까요? 그 부분에서 깊이감과 빛의 그라데이션이 표현된 부분이 특히 도드라져서, 어떤 중간적 매체처럼 보이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혹은 3차원의 사물을 매우 평평한 감각으로 보여주는 사진 프린트 작업도 있고요. 회화나 사진 작업도 종종 병행되는 것인지요. 혹은 조각에 좀더 집중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공간에 대응하는 일종의 가변 설치 방식으로도 볼 수 있고 어떤 것들은 파운드 오브제를 재배치한 것에 가까운 것들도 있는데요, 일련의 작업에 대하여 ‘조각’으로 규정하고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요?



3.     작업이 담고 있는 어떤 개인사적 기억이나 사물에 대한 대한 형태론적 인식, 현상학적 경험이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한편, ‘균형’ ‘붕괴’ ‘지지’ ‘평행’ ‘매달리기’ ‘기대기 같은 어떤 물리적 운동성과 재료의 물성, 그것들 간의 간격과 높낮이를 조율하는 형식적 실험 또한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또한 결과적인 형태를 보면 은근히 미술사 안에서의 조각적 클리쉐나 공공 조형물처럼 보이는 구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점을 의도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머리끈, 파운데이션 퍼프, 헬스 기구와 같은 조각적 소재의 재발견은 한편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하드한 소재를 주로 사용하는 기존 조각이 가진 추상성과 기념비성을 해체하는 특징으로 읽힐 수도 있을 같고요.

발끝으로 선 낮



-이보배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사  (신진 미술인 <발끝으로 선 낮> 전시 비평글 2022.07 )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자세를 낮추고, 주의를 기울여야 비로소 그 존재를 감각할 수 있다. 전장연이 작품의 재료로 삼는 것들이 그렇다. 머리끈, 화장퍼프, 담배꽁초, 민트캔디, 동전 등 물건의 가치에 우위를 두자면 하나같이 뒤로 밀려나는 것들. 없어도 그만이고 있어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사물들을 작품 안으로 들여오기까지 전장연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했을까.

전장연 작가의 개인전 《발끝으로 선 낮》은 일상에서 비롯한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조각 풍경을 통해 교차하는 힘의 관계와 균형에 주목하는 전시로, 작가가 평소에 눈여겨본 특정 장면 혹은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낮은 평범한 일상을 상징하지만, 뒤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서서 바라보는 일상의 풍경은 매번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반복 구간 사이에 위치한 불규칙적 요소, 일상에 자리한 긴장감은 모두 매일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게 한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사물들을 본래의 목적을 뛰어넘는 형식으로 재조합하여 새로운 관계망을 부여해 온 전장연은 이번 전시를 통해 개인 서사에서 비롯한 총 세 가지의 시리즈를 구성했다.

앞면과 뒷면
벽면에 기대어 놓인 조각들과 드로잉으로 구성된 <낯빛> 연작은 조형의 요소 중에서도 특히 ‘면’에 주목한다. 작품을 처음 마주할 때 보이는 검은색 면과 큰 대조를 이루는 옆면에는 높은 채도의 색이 채워져 있다. <낯빛>은 안색을 염려하며 안부를 묻던 친구와의 일화를 기반으로 한다. 전장연은 도형을 일컫는 한자 면(面)이 사람의 얼굴 형상에 기초한 점에 착안하여 얼굴의 ‘낯’과 도형의 ‘면’을 통해 감정의 앞면과 뒷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작품의 면에서 군데군데 발견되는 색조 화장품의 부품들과 측면 틈 사이에 위치한 스펀지 퍼프는 모두 어두운 낯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일종의 장치다. 말랑말랑한 퍼프들은 쌓여있는 블록들을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블록들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게 하면서 미세한 감정 선의 독해를 시도한다. 유사한 방식의 접근은 2014년에 제작된 작품 <2인용 테이블>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커피자국을 그대로 담은 세 개의 원형 테이블 상판과 틈 사이에 위치한 영수증, 카드와 같은 부속품은 역시나 불안정한 상태로 서로의 무게를 향했다. 얼굴표정이나 몸짓, 태도의 앞면과 뒷면을 의식하고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매일의 과제는 덩어리 면의 틈 사이의 스펀지 퍼프가 처한 상황만큼이나 가변적이다.

숨 고르고 정지
공중에 사선으로 설치된 파이프에서는 공이 아래로 떨어져야 맞지만 멈춰있고, 아래쪽에 위치한 추의 무게로 인해 최대 길이로 늘어나 있는 스프링 역시 당장이라도 튕겨 나갈 것 같지만 그대로 정지해있다. 전장연은 <숨 고르고 정지>에서 스프링이나 파이프, 밴드, 끈 등 신체와 관련한 운동기구의 일부분을 가져다가 선택적으로 재조합하면서 일종의 조각 드로잉을 제작했다. 몇몇 부품들은 요가나 필라테스와 같은 특정 스포츠를 즉각적으로연상시키는 한편, 주어진 조합의 형태에 따라 새로운 용도를 추측하게 한다. 작가는 전작 <광장>(2011, 2014)이나 <나무 사이로>(2011)를 통해서도 일상에서 발견한 사물들을 조각화한 바 있지만 <숨 고르고 정지>는 단순히 사물들을 조각의 언어로 치환하는 것을 넘어 사물들 간의 관계나 위계,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의 분배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작품 안으로 동력을 불러오는 본격적인 계기가 된다. 단순한 정지가 아닌 숨을 한 번 고른 후에 마주하는 정지는 방금 전까지 사물들이 마주했을 움직임을 상상하게 한다. 정지와 운동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에 대해 전장연은 ‘무언가를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한 삶의 긴장감과 같은 감각’이라고 말한다.

낮은 시선
<휴게>, <낮은 무지개>는 굽어진 철판에 면마다 각기 다른 색을 칠하고 여러 겹 쌓아올려 무지개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시실 안쪽 가장 어두운 공간 바닥에 위치해있다. 작품을 살피려 시선을 가까이하면 동전, 민트캔디, 담배꽁초와 같은 일상의 사물들이 철판과 철판 사이에 끼어있음을 보게 된다. 철판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은 침대나 소파 밑을 청소하다가 이따금씩 발견하게 되는 머리끈이나 동전, 또는 야외 아스팔트 바닥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담배꽁초나 껌과 같이 모두 ‘하찮은’ 것들이다. 두 작품 모두 <낯빛> 시리즈에서처럼 겉면은 어두운 색을 띄고 있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요소들 간의 복잡한 관계가 전면에 드러난다. <서클 본딩>은 작가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쌓았던 유대감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금속의 원 형태는 어린아이의 방울 머리끈으로 이어져있다.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오가는 유대는 방울 머리끈이 은유하는 것처럼 관계를 지탱하는 결정적인 지지대가 된다. <주워온 밤> 역시 육아의 현장에서 시작된 사진작품으로 92x95cm의 화면은 현미경으로 바라보거나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본 듯한 밤하늘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일회용 인공눈물 뚜껑, 소형 나사, 끊어진 은목걸이, 스테이플 심, 과자봉지의 끝부분 등 사실상 버려지는 것에 불과한 부스러기들은 모두 작가에 의해 개별 스캔되어 디지털 콜라주화 되었다. 이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작업과 육아를 병행하는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루틴임과 동시에 다수에게 통용되는 일상의 낯일 것이다.

전장연의 작업은 이전에 개별적으로 제작되었다가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형식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재구성되었다. 《발끝으로 선 낮》의 사물조각들이 그려내는 일상의 면면은 결코 단조롭거나 안전하지 않다. 서로의 위치와 무게를 접점 삼아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에서 발견된다. 힘껏 발 끝에 기대어 선 채로.



Daylight on Tiptoe

-Lee Bobea, Curater at SeMA  , <Daylight on tiptoe > Solo show 


These are things usually unseen. Only when we must lower our postureand pay attention can we sense their existence. The materials Jangyeun Jun usesfor her art are like this. Whether hairpins, powder puffs, cigarette butts,mint candies, coins, or other miscellaneous items, they are easily at thebottom of the list of things in terms of their value. One wonders what storieswere required of Jun for her to choose to bring these insignificant objectsinto her work.

Jangyeun Jun’s solo exhibition, Daylight on Tiptoe, focuses onthe relationship and balance of powers that intersect through the fragmentedlandscapes created by everyday items, and it starts from specific scenes orexperiences the artist has kept an eye on. Daytime usually stands in forordinary everyday life, yet the everyday life we see on tiptoe is not alwayssmooth sailing. The irregular elements between repetitive sections and thetension found in the quotidian give every day a slightly different way ofperceiving. Interested in taking daily objects, reorganizing them in a way thattranscends their original purposes, and conferring new relational networks uponthem, Jun presents three series she has composed from her personal narratives.

Front and Back
The Light of Face series, which consists of sculptural worksand drawings leaning against the wall, focuses especially on the “surface”element of sculpture. The surface of the side, which stands in stark contrastto the black surface one sees first upon encountering the work, is filled withhighly chromatic color. Light of Face is based on an episode of theartist whose friend was concerned for her well-being upon seeing hercomplexion. Based on the fact that the Chinese character myeon (面) is a pictograph of the human face, Junattempted to explore the front and back sides of emotions through herinvestigation of human “faces” and “surfaces” of figures. Make-up items foundsporadically throughout the surface of the work, as well as powder puffs wedgedin the gaps, are all a kind of tool to cover up dark complexion. The softpowder puffs attempt at reading a delicate emotional frequency by itsambiguity—it is not clear whether they are cornerstones barely supporting thestacked blocks or precariously squeezed between the blocks. A similar approachwas first made in Jun’s 2014 work A Table for Two. The three round tabletopsstained with coffee and items such as receipts and cards placed in the gapsseem to—again—point to each other’s weight in an unstable state. The everydaytask of having to be aware of the front and back of a facial expression, agesture, or an attitude and maintain a tight balance is as unsteady as thepowder puffs stuck in between the blocks.

Draw breath and pause
It is only natural for the balls to roll down along a pair ofdiagonally installed steel pipes in the air, yet they remain static, and thespring extended almost to the full by the weight attached under it appears tofly off any moment, yet it remains still. In Pause, Jun created a kindof sculptural drawing by reassembling parts of exercise equipment related tothe body, such as springs, steel pipes, bands, and strings. Some of theseobjects instantly remind us of specific fitness activities like yoga orPilates, yet their new assemblage also allows us to infer their new uses. Theartist has already experimented with turning everyday objects into sculpturalworks in her earlier works—Public Square (2011, 2014) and BetweenTrees (2011)—but with Pause, Jun goes beyond merely replacingobjects with the language of sculpture. It provides momentum for the artist tobring a kind of dynamism into her work in that the work evokes the relation andhierarchy between objects and the distribution of invisible powers. This pauseis the kind one takes after drawing breath, and it allows the audience toimagine the movements the objects were engaged in just before coming to a halt.Regarding this boundary between rest and motion, Jun notes that it is“comparable to life’s tension in trying to maintain and sustain something.”

A lowered gaze
Breaktime and Low Rainbow, placed on the floor of thedarkest corner of the exhibition room, are representations of rainbows createdby layering multiple plates of curved steel, each painted in a different color.Upon closer look, we find everyday objects such as coins, mint candies, andcigarette butts squeezed in the gaps between the steel plates. The objectsfound between the plates are all “useless” items—hairbands or coins foundunderneath the couch while cleaning, cigarette butts, or chewing gum commonlyfound on the ground outside. Both works feature dark surfaces like the Lightof Face series, but a closer look reveals a complex relationship between theelements that are supporting each other. Circle Bonding, based on thebond formed between the artist and her daughter through their time together, featuressteel circles connected with beaded hair ties commonly used for girls. The bondformed between those who share their daily lives becomes a crucial support beam,as expressed in the metaphor of the beaded hair ties. Night Square islikewise a work that stemmed from Jun’s experience as a parent, and it is aphotographic work that shows within a 92x92cm space a scene that either lookslike something seen through a microscope or a satellite image of a night sky. Disposablescraps like an eyedrop cap, small nuts and bolts, a broken silver necklace,stapler needles, and the edge of a snack bag were all individually scanned anddigitally collaged. This shows a very personal routine of an artist who mustmake art and parent a child, but it is also a sliver of daily life common tomany.

Jangyeun Jun’s works as shown here have each been produced separatelybut were reorganized for this exhibition in a way to present a singlenarrative. The aspects of everyday life depicted by the miscellaneous objectsin Daylight on Tiptoe are far from monotonous or complacent. The way inwhich they barely hold their respective balances by way of leaning on eachother’s weight and placement is all too similar to what we find in our dailylives—with all our might on our tiptoes.

낮은 사물들로써 세워진
추상적 조각의 스토리텔링


- 양효실 비평가 (아트플러그 성과 보고전 2022.2)



집안의 물건들 세우기

전장연이 30대로 넘어갈 즈음 평면(회화)에서 “조각”으로 매체를 바꾼 것은 우연한 사건에 기인한다. 장연의 작업에 일대전환기가 되었던 2011년 전시 <멈춰선 것들>은 동전, 플라스틱 머리띠, 물병 뚜껑, 백열전구, 렌즈와 같은 동그란 형태의 사물들의 한 부분을 갈아서 주르륵 세워놓은 전시였다. 구르다가 쓰러지는 사물들에 지지대를 수여함으로써 사물의 형태를 수정하고, 그것들을 조각‘처럼’, 조각으로써 전시장으로 끌어들인 실험에서 장연은 “발에 채이기 쉬운 작은 사물들이 일어서서 주목을 끌 때 적지 않은 희열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일상적인 용도뿐인 물건들에서 조형적 유사성/공통성을 발견하고 하나의 범주로 묶고 거기에 걸맞는 지위를 수여하는, 개념미술적이거나 아방가르드적인 실천을 통해 장연은 일상과 예술, 기능적 물건과 미적 사물의 이분법을 또 허물었다. 작가 자신의 집안의 물건일 저 동그란 오브제들/사물들의 평범함의 ‘고유한/적절한(proper)’ 지위를 놓고 사유하고 감각하기.

저것들은 동그랗고 굴러다니고 “발에 채이는”, 다시 말해서 걸리적거릴 뿐, 상품으로써 값이 나가거나 사물로써 취약하거나 기념물로써 소중한 것들이 아니다. 저것들은 구석으로 밑으로 틈으로 사이로 쓸려 들어가 먼지처럼 잊히는 것들이다. 사고 잊고 또 사고 찾아보면 여러 개가 한꺼번에 보이는 ‘낮은(low)’ 물건들이다. 집안의 물건들의 위계 속에서 바닥을 차지하는 것들이다. 장연의 주목과 발견, 개입과 변용의 특수함은 이렇듯 그녀가 발견한 물건들, 사물들이 더 사소하고 더 무의미하고 더 아래에 있는 것들이라는 데 있다. 일상을 발견하고 미술관으로 옮겨오는, 역할과 기능의 전환이나 낯설게하기는 동시대 미술에서는 흔한, 자주 사용되는 기술이다. ‘예술’의 생존이나 이후의 삶을 책임지는 일상적 오브제들의 미적 전용/변용에서 장연의 사물들, 물건들은 더 주변부적이고 더 비가시적인 것들이다. 설사 특수한 사물들에게 비춰지는 전시장 조명 아래에 놓이게 된다고 해도, 장연의 낮은 사물들이 잘, 정확히, 크게 읽히거나 전달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소한 사물들과 사소한 위반, 그러므로 “적지 않은” 희열을 초래한 실험은 남들의 이목이나 관심을 즉각적으로 끌지 않을 것이기에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오고 가는, 보고 잊는 관객들 사이에서 마치 잔상이나 에코처럼 살아있을 수 있는 끈질긴 존재, 사유, 태도의 실험이다.

(뒤샹이 변기용품을 파는 상점에서 자신의 변기를 발견한 것처럼 여성(주의) 작가들은 집안에서 자신의 대안적, 위반적 오브제나 가설들, 장치들을 발견했다. 장연이 자신의 집에서 꺼내온, 장연의 자아의 미적 은유로써의 낮은 사물들의 조각적 변용은 예술에 대한 정치적 말걸기로서의 여성주의적 실천과 추상적 조형성의 물질적 담지자로서의 규범적 조각의 이념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려는, 치우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통해 일어난다.)

장연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상태, 혹은 힘을 나누어 기대어 있는 상태, 혼자서는 오롯이 서기 어려운 감각을 보여주는 것”에 더 집중하려한다고 적었다. “기대어 있거나, 쓰러지기 쉽거나, 힘주어 서 있거나 하는 것이 안전하거나 온전하지 않은 삶의 상태와 더 가깝고 솔직하다고 느낀다”는 장연의 문장은 독립, 자유, 자율과 같이 예술가-개인주의에도 영향을 준 (근대적)자유주의의 이념과는 거리를 두려는, 제대로/잘 서 있을 수 없는 물건의 조각적 변용으로 번역된 취약한 유기체들의 생존방식을 압축한다. 나타나자마자 눈에 띄고 각광을 받는, 그런 강한 존재들과는 조금 거리를 둔, 바닥에서 구르거나 쓰러져 있어서 “발에 채이기 쉬운 작은 사물들”에게 조명을 쏘이려는 행위의 가치는 길고 오래가는, 가늘고 긴 삶이나 그런 삶의 비유들, 스타일들을 이미 이해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나는 장연이 이번 아트 플러그에서 입주 작가들을 위해 진행한 글쓰기 수업에 제출한 문장들이 문장가, 에세이스트로서의 장연의 능력을 증명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연의 에세이는 행간, 여백에서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 글이다. 장연이 자신의 물건들, 더 무의미한 것으로써 그러나 조형적으로는 가치를 갖는 물건들을 집안에서 미술관으로 끌어들여 주목하게 했던 것처럼 장연의 문장들 역시 그렇다.


지금 여기 일상의 미적 변용

이번 인천 아트플러그 레지던시 입주는 이제 어린이집에 갈만큼 성장한 딸 태린의 양육에서 비교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장연의 주부생활에서의 변화와 연동한다. 집에서 한 시간 운전을 해야 도착하는 아트플러그에서 그러나 장연은 독립된 공간 안에서 자신이 끄적거린 스케치(이미지, 도형)가 전시에 나타날 추상적인 조형성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태린의 그림, 도형들, 가령 태린의 원형, 별, 무지개를 복기하고 반복하고 있음을 목격했다고 썼다. 가볍고 사소해서 어디서든 “발에 채이는” 오브제들, 사물들은 “아이가 자고 있는 이 고요한 시간을 무식하게 찌르는 별의 모서리”처럼 작업을 위한 의자에 먼저 앉아 있거나, 아트플러그의 작업실도 장악한 것이다. 물리칠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에코처럼 유령처럼 자신의 몸과 무의식을 장악한 태린의 물건들, 이미지들, 도형들을 인정하면서, 장연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식성”, “하트와 별,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것, 사랑스러운 것, 귀여운 것”을 탐내는 마음이 곧 작가인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는, “필수적이기 보다는 불필요하기 일쑤인 장식”으로써의 예술이 곧 자신의 예술론임을 인정한다, 고백한다.

이번 입주 작업의 결과 보고전 《APY 레지던시 보고전: I always wish you good luck》에 제출한 네 점의 조각 중 <낮은 무지개>는 딸의 일상, 이야기를 조형적으로 변용, 구축한 것이다. 형형색색의 시각적 환영인바 먼 곳의 무지개는 주문공정으로 전해받은 단단하고 차가운 철판 사이에 숨어 있다. 제목으로 표지된 무지개를 보려면 조각적 사물 가까이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거나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서, 태린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여러 장의 철판은 미세하게 벌려져 있고 그 사이에 역시 사물이고 오브제인 민트캔디와 동전이 있다. 그리고 철판을 벌리는 데 이용된 것인지 벌려진 철판 사이에서 보여져야 하는 ‘바로 그것’이어서인지, 수단인지 목적인지 불분명한 사물들 사이로 무지개 색이 보인다. 어른들의 감상법에 다름 아닌 관조는 구석이나 시시한 것에 주목하는 아이의 호기심이나 자세를 취해야하기에 불가능해지고, 올려다보기 마련인 무지개는 구석 하단에 조각적 형상에 숨어 있다. 장연의 집(구석)에서 장연의 가방에서 옮겨졌을 것이 분명한 캔디나 동전이, 틈으로 떨어지거나 사라진 물건들이 각자의 기억이나 몸에 각인된 이야기를 시작한다(돌아가신 외할머니댁 마룻바닥으로 또르르 굴러들어간 삔, 동전, 연필 같은 것을 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워하고, 찾고 있다. 그 집은 이미 무너졌지만 나는 여전히 할머니 집 마루 틈새에 눈을 들이댄 소녀이다). 장연의 조각은 시시한 것들이 굴러가고 사라지고 겨우 보이고 갑자기 중요해지고, 시간 속에서 상실 속에서 절대적 대상이 되어가는 욕망의 구조를 복기하고 실연하고 증언한다. 태린이 주인공인, 장연이 대신 전해주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작고 사소한 스토리 없이는 우리는 현재를 견디거나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에게서 멀어졌음을 견디거나 이겨야할 태린은 이 작품을 보면서 눈에 안 보여도 마음은 보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예술가 엄마와 ‘장식쟁이’ 태린의 무언의 대화, 사랑, 인정, 기다림.

딸의 머리를 아침마다 묶어주는 엄마들의 손의 행위를 모방하고 복기하는 <Circle Bonding>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유기체처럼 만들고 세우는 조각가와 딸을 일으키고 장식하는 엄마의 유비, 유사성이 암시적으로 작동한다. 조형적이고 장식적인 이미지나 도형을 만드는 엄마와 딸의 ‘평등’, 유대가 감지된다.


한 사람의 영향이나 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만든 작품들이 결국 ‘보편적인’ 반응이나 공감을 일으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랑의 사소함, 일상성이 미적인 것을 이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 ‘우석’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추상적이고 조형적인 조각의 특수성 안에서 스토리가 작동하는, 단단하고 견고한 철판 속에서 담배꽁초와 무지개가 제 사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시 낮고 작은 조각 <휴게 Break Time>가 있다. 이제 장연은 마흔이 넘은 중견/본격 작가의 위치에 있고 어린 딸을 건사하는 엄마이자 주부이다. 장연의 고등학교 동창인 우석은 “연극인과 영화인 어디쯤의 객기”를 품은 채, 마을버스 운전으로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다. 자식을 키우면서 ‘자아-실현’ 혹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우석은 장연에게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이미지이다. 장연은 고등 동창들의 단체 카톡에 우석이 올린 무지개 사진과 그가 그때 피웠을 게 분명한 담배 꽁초를 소재로 중년의 예술가들, 암중모색 중인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의 밸런스를 형상화한 조각을 만든 것이다. 벽이 지지대인 이 작은 조각의 안에 숨은 팔주노초파남보의 존재는 담배꽁초에 의해 겨우 보여진다. 곧 사라짐은 무지개와 담배(연기)의 속성이지만 철판에 칠해진 무지개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 차갑고 단단한 철판을 감당하는/육박하는 담배(꽁초)의 물질적 힘이 철판이 닫으려는 무지개 색의 증언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직 혹은 당분간 혹은 영영 전업작가일 수 없는 이들이 장연의 직관하듯이 “안전하거나 온전하지 않은 삶의 상태”의 바로 그 형상, 위치 중 하나라면, 친구의 이야기와 자신의 형식을 버무려 불안정한 예술가의 삶과 꿈을 긍정하는 장연의 작업, 작품의 당대성이나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태린이와 친구에게서 전해 받은 것을 갖고,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딸들에게 불안정한 동료 예술가들에게 그러므로 관계 속의 우리와 꿈을 꾸는 우리에게 계속 하라고 계속 가라고 응원하고 있는 장연의 환하고 동그랗고 곡선인 메시지.


방바닥에서 찾은 우주  
(2023. 6.23 조선일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읽기63 ) 


- 신수진 예술 기획자. 한국어 외대 초빙 교수 


집은 누군가의 우주가 시작되는 곳이다. 집에서 수집되는 감각은 온전히 ‘나다움’을 만드는 기억이 된다. 집 안엔 거창하거나 특별하기보다 사소하고 일상적이어서 의미 있다고 여기기 어려운 순간이 쌓인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창문을 열 때 밀려드는 바람 냄새, 사각거리는 이불의 촉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지만 다름을 알아채기 어려운 시간이 오늘도 집에 흐른다.

타인과 공유하지 않는 일상의 기억은 지금의 나를 만든 출발점이며, 먼 훗날 어쩌면 사무치게 그리워할지 모르는 오늘에 대한 비망록이다. 전장연(1982~)은 회화에서 시작해서 최근엔 공간에 설치하는 조각 형태 작품을 주로 선보이는 신진 작가다.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말이나 글에는 ‘일상’과 ‘조율’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예술에 대한 열망과 가족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는 자신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이 사진이 속한 ‘발끝으로 선 낮’(2022) 연작은 육아를 비롯한 일상의 과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그 누가 생활인과 예술인의 경계를 딱 잘라 말할 수 있겠나마는, 전장연의 작품은 투명하고 분명하게 그 경계를 탐색한다. ‘주워 온 밤’은 집 안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우주의 행성처럼 보여준다. 먼지, 과자 봉지 조각, 플라스틱 꼭지, 그 밖에도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물체들이 알 듯 모를 듯 어두운 하늘을 밝힌다

이제 겨우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무언가를 잡을 정도로 자란 아이. 온종일 집 안을 종종거리다 이내 엄마의 눈길과 손길을 찾는 아이. 엄마는 그 아이가 주워 온 티끌을 쓰레기통이 아니라 스캐너에 올렸다. 짙푸른 색 담요를 덮어 스캔하고 한 화면에 모아 놓으니 밤하늘에 별이 뜬 모양새다. 다시 오지 않을, 아이와 보낸 그때를 예술가 엄마는 이렇게 사진에 담았다.

오늘도 세상 엄마들은 평범한 개인사와 비범한 열망을 조율하는 그 어느 지점에서 분투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는 곧 자라서 자신만의 우주를 가지게 될 것이다. 사는 게 그렇다. 참 고단한데, 또 아름답다.
삶을 수행하는 과정과 방식까지 종합하는 개념인 것이다.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6/23/SQK62FKAAFFVREVUVUZKSRHCCQ/


전장연, 주워온 밤(Night Square, 2019)


조각적, 사진적
 

-김정현 미술평론가 (  Spiral Movement 전시 비평글 20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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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소식도, 심난한 뉴스도, 스팸 문자조차 한통 날아오지 않는 하루를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지루하다고 해야 할까. 난파선에서 구조되어 한숨 돌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순간의 시간에 영원의 감각을 부여할 테고, 별 일 없는 일상의 다행함이 익숙한 일상이 된 자들에게는 변덕스럽게 비극적 취향이 깃들기도 할 것이다. 머릿속에서 팽창하는 지루함이 손끝과 발끝까지 내려와 마비가 올 때쯤 용케도 자리를 박차고 거리로 나간다.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도시의 풍경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반복적인 재방송과 긴급한 사치의 홈쇼핑 광고로 번잡하게 돌아가는 수 백 개의 케이블 채널이 한꺼번에 펼쳐진 것처럼 복잡하다. 그리고 지루하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카드를 긁는다. 커피 한잔에 4,600원을, 메이크업 조각 스펀지 묶음에 8,010원을, 90일분 콜라겐 영양제에 29,900원을. 이런 식의 소비는 일상이 되었다. 매일 커피를 마시고, 매일 멀티 샵이나 인터넷을 뒤져 필요를 만든다. 프랑스 철학자 코제브가 50년대 미국에서 마주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사회의 충격은 반세기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전 지구적 대도시의 삶에 대체로 편안하게 흡수되었다.

전장연의 <2인용 테이블>(2014)과 근작 <낯빛(色面)1>(2021)의 사이에는 7년의 간격이 있지만 일상용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일관성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일상적인 물건들”에 자꾸 눈이 간다는 작가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풍경 속에 내재한 미묘한 불안감을 포착한다. 아니, 관찰자의 시점에서 냉정하게 포착한다기보다는 그 안에 속한 자로서 어느 날 문득 위화감을 느끼는 편에 가까워보인다.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변화해 소비문화의 첨단에 서있는 서울에 다시 돌아왔을 때, 추상적 언어를 탐구하는 작가의 삶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에서 상투적이나마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세속적 삶 사이의 경계가 감지될 때,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 Uncanny)’이 엄습한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른다면 이는 언제나 친숙한 것이었다가 억압 기제에 의해 낯선 것이 된 것으로, 죽음, 시체, 죽은 자의 생환이나 귀신과 유령 등에 관련된 것이다. 작가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에서 소재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어두운 낯빛을 가려주는 화장이 작가 개인의 맥락에서 어떻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는지 밝혀내는 일은 심리분석가에게 맡기자. 여기서 그보다 중요한 건 그의 실존적 불안과 창작적 매혹이 이중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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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 세우기. <2인용 테이블>에서 커피 테이블의 대리석 상판을 그대로 가져와 다른 재질의 판들과 마주 쌓고, <낯빛(色面)1>에서 색조 화장품을 바른 나무판 여러 장을

절묘하게 포개어 벽에 기울인다. 요소 간의 연결을 통한 단단한 구조의 창조는 오랫동안 조각의 이상이었으나, 모듈의 연결을 생략한 칼 안드레의 시도나 그렇게 분리된 요소들 간의 균형과 응축된 힘을 추구한 리처드 세라의 작업은 조각의 새로운 전환점을 표시한다. 전장연의 조각은 구조적으로 세라의 초기작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요소를 접착하지 않고 세우는 작업에 대한 관심은 미술사의 참조나 차용보다 개인적인 관심에서 먼저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장연의 초기작인 <멈춰선 것들>(2014)에는 알약이나 동전만한 크기의 작은 사물이 테이블 위에 옹기종기 서있다. 수집한 사물의 밑을 갈아서 조심스럽게 세워놓은 것이다. 무겁고 거대한 재료를 다루는 작업에 대한 부담은 자기 신체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재료를 한정하게 했다.

곧바로 두 가지를 번복하려고 한다. 첫째, 전장연의 조각은 재료(material)가 아니라 사물(object)로 이루어진다. 사물을 세우기 위해 바닥을 살짝 갈아서 평평하게 만들거나, 신작에서는 심지어 나무판에 색조 화장품을 덧입히는 비교적 과감한 개입까지 나아갔지만 작업 언어의 초점은 여전히 재료의 물성을 탐구하는 것보다 수집한 사물의 배치에 있다. 둘째, 요소 간의 구조적 지지라는 세라의 주제를 초과하는 긴장감이 있다. “긴장감 있는 형태”에 대한 관심은 절묘한 균형 못지않게 무너지기 쉬운 상태의 조각을 낳는다. 세라가 여러 개의 평면 모듈을 맞대어 세웠다고 한다면, 전장연은 그렇게 맞닿은 평평하고 넓적한 사물들 사이에 카드 영수증이나 메이크업 스펀지 조각과 같은 사소한 물건들을 끼워 넣는다. 면적이 넓은 단단한 재료로 변화무쌍하게 만든 무대에 작고 가벼운 재질의 사물이 출연하여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즉, 재료의 모듈이 아니라 사물의 연극을 연출한다.

<숨을 고르고, 정지>(2020)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불안정한 지지대와 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사물의 조합은 이번에는 운동기구의 구조와 운동용품의 기호를 빌어 나타난다. 스테인리스 철봉이나 매트와 같이 피트니스 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 위에 맛사지 볼이나 라텍스 밴드가 저울의 수평을 맞추듯 절묘한 위치에 걸린다. 특히 이 작업에서는 모든 구조가 스프링에 걸려 천장에 매달려있다. 잔뜩 늘어난 스프링은 그것에 매달린 물건의 무게를 짐작하게 하거나 가벼운 충격에도 흔들릴 수 있는 운동성을 지닌 사물이지만, 작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천장 거치 구조가 전적으로 스프링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왼쪽에 쇠사슬을 함께 매달아 오른쪽에 스프링이 늘어난 높이를 고정한다거나, 바닥에 세운 안전봉과 높이를 맞춰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다. 따라서 매우 드문 확률로 관람객이 조각에 강한 힘을 가하지 않는 이상 스프링은 흔들리지 않고, 라텍스 밴드는 벗겨지지 않고, 공은 굴러가지 않는다.

스프링이나 라텍스 밴드와 같이 분명히 힘이 가해졌으나 정지된 상태로 구축된 작업. 오직 픽션으로서만 붕괴를 암시할 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도록 미묘하게 장치를 마련해두는 제스처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 전시작은 아니지만 작가는 <균형잡기>(2014)라는 작업에서 벽에 기댄 유리판 사이에 비타민 알약을 끼워 넣는 설치를 하면서, 습도와 유리판의 무게 등의 이유로 알약이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짜 알약 대신 석고로 만들어 채색한 가짜 알약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는 재료가 아닌 파운드 오브제를 조각 언어의 바탕으로 삼는 작가의 방법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든 백화점 디스플레이에서든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거치 구조를 구상하는 것만큼, 개별 사물의 속성의 차원에서도 일상적이거나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 무겁고 거대한 재료 대신 그럭저럭 혼자 다룰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변형되거나 바스라지기 쉬운 재료의 물성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일상 기물을 도입하여 소재로부터 모종의 의미가 발생하도록 하지만, 그것의 현실주의적 의미(만)를 내용으로 삼지 않는다. 현대 소비사회의 물신주의적 욕망을 비판하기 위해서(만) 소재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전장연의 작업은 무엇보다도 구조가 무너지기 직전의 시간이 응고된 순간을 역설적으로 견고하게 재현한다. 그런 면에서 전체 작업 중 유일하게 자연지물이 등장하여 소재주의적 해석을 배제하는 <몸짓 드로잉>(2021)은 상징적이다. 2015년 목가적인 자연 환경에서 생활하며 도시에 없던 정적에 낯설음을 느꼈던 작가는 적막을 깨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갈고리형 손잡이를 쥐고 창문을 열려는 한쪽 손의 손등에 작은 돌멩이가 얹혀 있다. 멀리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조그맣게 울리는 오래된 건물의 서늘한 실내에 이내 요란한 파문이 일 것 같다. 그러나 죽은 시간은 소리가 없다. 고요하게 얼어붙은 전장연의 ‘조각적인 풍경’은 사진적이다.

주워온 우주 (주워온 우주 전시 서문 2019.12 )


-송요비  기획자 



개인의 정체성, 여성의 성역할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과정은 누군가의 삶, 인생이 이렇게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을 경험하기 전에는 미리 알지 못한다. 이전에 한 이탈리아 작가를 인터뷰했을 때 출산과 육아의 시간에 대해 그녀는 ‘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왔을 때 외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FK고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작가 자신의 삶은 너무나도 크게 달라졌고 그 변화에 그 세상을 받아들여가며 위해 부모가 된 우리는 한 생명체를 키워가기 위해 큰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여가며 인생의 한 계단을 만들어 간다. 전장연 작가 또한 영국에서 육아시간 동안 작업과 단절된 시기를 지나 ‘오랜만에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의 낯선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생명을 키워가는 과정에 여성의 시공간은 혼란의 순간이 휘몰아친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과정에서 엄마 이외의 정체성이 그대로 존재하려면 무척이나 큰 노력과 의지와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를 만나고서야, 그 시간을 마주하고서야 실감할 수 있다. 전장연 작가 또한 한 인생의 엄청난 시공간의 변화를 겪어 내고 있음을 ‘주워온 우주’에서 시각화하였고 관객은 이를 통해 작가의 새로운 인생을 만난다. 인생의 큰 변화 후 개인전을 준비하며 기존의 작업 방식인 일상 사물을 이용하지만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아이의 장난감, 젖꼭지, 인형들을 여러 일상 사물들에 부착하거나 해체 후 결합 새로운 방식의 ‘설치’ 작품을 하는 등 다양한 첫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요소들은 무척이나 생소하고 낯선 조합들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의 결합체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이렇게 이질적 사물들의 결합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계속 작품을 바라보면서 시각적으로 익숙하게 되자 작은 섬세함이 다가온다. 작가는 ‘작가로서의 자신’과 ‘육아의 주체’가 된 자신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 인생의 현실을 작품으로 만들어 낸다.
개인의 정체성의 요소 중 하나인 성 역할 정체감(gender-role identity)은 한 개인을 특징짓는 성격 특성과 행동 특성의 집합체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얼마만큼 남성적 또는 여성적 성격 특성을 소유하는지 평가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 역할 정체감은 온전히 개인의 내면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영국의 교육 사회학자 휴즈(Hughes, 2010)에 따르면, 사실 성 역할은 사회의 주류에 의하여 가정된 정체성이다. 개인은 사실상 사회 또는 집단의 설정에 개인의 행동을 맞추어 성역할 정체감을 설정하는 ‘정체성 일치(identity congruence)’를 이룬다고 하였다. 여성들은 임신, 출산, 육아를 기점으로 내 몸과 단절되는 경험을 하며, ‘임신을 준비하는 몸’, ‘임신 기간 동안 아이를 보호하는 몸’, ‘출산 후 육아를 하기에 적합한 몸’으로 살아간다. 임신, 출산, 육아라는 것이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과정과 경험들 임에도 불구하고 구술자들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되고, ‘타자화’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임신, 출산, 육아라는 사건이 ‘당연시’되고 ‘이의제기’해서는 안 되며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Adair, 1992) 또한 푸코는 이처럼 권력이 행사되는 지점으로서의 ‘몸’에 관심을 두고 순응적인 신체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푸코는 특정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몸을 특정한 방식으로 훈육해 사회 문화적으로 수용 가능한 몸의 형태와 몸의 실천을 논의하고 있다(Foucault, 1979). 푸코가 말하는 ‘유순한 몸(docile body)’은 문화적 생활 규범에 의해 규제된 몸이다. 푸코는 시간, 공간, 일상생활의 조직과 규제에 의해서 우리의 몸은 훈련되고 형성되며, 그러한 몸 위에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자아, 욕망, 남성성, 여성성이 새겨진다고 하였다.


북두칠성의 새로운 행성들


‘주워온 우주'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일상 사물을 스캐너에 스캔하여 프린트한 ‘주워온 밤’, ‘숨바꼭질’ ‘숨어든 귀’, 그리고 전시 공간에 철제 구조물로 세운 북두칠성, 그리고 그 북두칠성의 구조물을 구성하는 7종류의 변형된 사물 오브제들이다. 작가의 오랜 작업 방식을 이용한 사물을 스캐너에 스캔한 이미지들은 사진으로 찍은 오브제 보다 더 충실히 대상의 표현 질감을 드러낸다. 3점의 이미지는 유아 장난감 사물을 스캔한 이미지와 작가의 상상의 이미지 드로잉이 함께 물건의 원래 모습을 변경한다.
변형된 사물은 작가 자신의 삶의 모습을 비유하거나 모양과 기능으로 변모하면서 스스로 예술의 주체적 대상으로 변화하도록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작가가 모티브로 선택한 북두칠성은 하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를 도는 행성의 무리이다. 이 별자리는 인간의 수명을 주관한다고 믿어져 왔으며 민화에 따르면 우리는 북두칠성 신선의 점지를 받아 태어난다. 그런데 출생 과정만 북두칠성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재래식 장묘 관 바닥에 깔기도 하며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때도 북두칠성을 통한다고 믿었다. (박석재, 2013) 작가는 인생을 주관한다는 별자리를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오브제들로 7개의 행성을 탄생시켰다.

7개의 행성의 이름은 ‘토끼 발의 행운’, ‘가느다란 시간’, ‘손이 네개’, ‘유모차 엘베’, ‘유목 육아’, ‘우주적 조합’, ‘슈퍼 맘’ 이렇게 작가의 삶의 현실과 상상하는 현실을 은유하는 사물들의 유희적 결합들로 구성되었다.  <주워온 우주> 속 북두칠성의 가장 첫 행성은 ‘수퍼 맘’이라고 제목을 붙인 작품으로 남성 양복 재킷에 직접 자수작업으로 여성적인 매체를 남성의 양복에 새겨 넣은 오브제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해 직접 자수하는 기술을 배워 실제 작업에 활용하였다. 작가는 수퍼 맘의 상징, 기저귀를 가는 행위의 이미지들을 새겨 넣었다. 마지막 7번째 행성의 이름은 ‘토끼 발의 행운'이다. 실제 흰 토끼 인형을 사용한 토끼 발은 오랜 전설 속에서 행운을 가져오는 장신구의 일종으로 수백 년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온 것이다. 작가는 두 이질적 요소인 우리 생활 속에 익숙하게 들어와 있는 일상 사물과 사회 속에 오래 내려져 온 이야기 속 미신과 토템의 속 아이템들을 작품에 동시에 적용해서 북두칠성의 한 행성으로 제작하였다. 토끼 인형의 머리는 가느다란 원형 철제 구조물 고리에 걸려 있으며 그 사이사이 유아들이 가지고 노는 플라스틱 화려한 색상을 한 원형 장난감을 작은 행성을 구성하는 세부요소로 사용한다. ‘손이 네개' , ‘유목육아' ‘ 유모차 엘베'는 작가의 삶에서 많은 비중을 가지게 된 ‘육아'를 하는 엄마로서의 여성이 된 모습을 형상화한다. 이뿐 아니라, ‘여성적' 아이템인 진주 목걸이와 털 직물, 그리고 그 사이사이는 아이가 엄마와 오랜 시간 보내는 시기를 상징하는 영아 젖꼭지가 붙여 있다. 또한, 육아와 거리가 먼 여성적 사물인 진주 목걸이는 아기 장난감과 동일한 등위로 다룬다. 이런 방식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대상을 만나는 관객은 여성의 우아함을 상징하는 오브제들이 한순간 육아하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성 역할에 제 모습을 잃고 있음을 목격한다.


사물들의 선택과 결합_소비의 결과들


이 7개의 행성은 바닥도 벽면도 아닌 전시공간의 한중간에 마치 쇼핑을 위한 디스플레이 설치처럼 자리하고 있다. 한국 생활에서 혼자가 아닌 아이와 돌아온 후 “아이와 보내는 시간과 나 자신의 시간이 그리고 육아와 교육이 철저하게 자본과 소비에 연결된 현상”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소비문화 안에서 개인의 경험들이 선택과 조형의 과정을 거치는 사물을 통해 전달되고 공유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물건들은 타인과 어떤 감정적으로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킬 때 완성되면서 공유를 위한 ‘사물적 표시’가 된다고 설명한다. 한국 사회의 강력한 소비 주체로 떠오른 엄마들은 아이를 갖는 순간부터 여러 기관과 회사의 타깃 고객층으로 분류되어 많은 소비를 위한 정보의 홍수를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마치 쇼윈도의 소비 대상을 바라보듯이 관객이 작품을 볼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하였다. 아이들 교육, 건강 등 모든 분야의 상품들은 아이를 가지는 순간부터 쇼핑과 선택을 고민하는 소비자로의 일상을 표현하였다. <주워온 우주> 전을 통해 인생의 여러 계단을 올라가는 한순간을 기록한 어려움과 변화의 작품들을 만나는 일은 잊을 수 없는 바로 몇 년 전의 나 자신을 만나고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알 수 없는 혼돈과 여러 낯선 시간으로 가득한 시기에 더 성숙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믿고 싶었던 간절함을 떠올렸다. 육아가 여전히 사회적으로도 남성들과 공동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이야기되지만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주워온 밤>에서 아이가 주워온 여러 사물들을 스캔하고 프린트한 것은 아마도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기록처럼 박제되어 영원히 남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또 사라지는 우주 속에 작은 사물을 찾으며 빛나는 행성처럼 빛나는 순간들이 되기를, 앞으로 작가의 작은 일상들이 작품의 요소로 등장하면서 공유되는 다음 순간이 기다려진다.

사물이 주는은밀한 메세지  (거짓말 하는 사물들 개인전 서문 2014.08) 



-최주연


오브제는 예술가에의해 선택되기전에는 예술과 무관한 대량생산된 기섬품일 뿐이다. 하지만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일상의 사물은 예술작품에 사용됨으로써 현실과 예술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오고 있다 , 본래의 물건이 가진 기능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각의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술에 있어서 사물은 본래의 형태적인 특징과 기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현하는 시적 상징성을 갖기도한다. 전장연은 오브제가 가진 고우한 특징을 넘어 작가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변형하고 배치한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사물들의 미묘한 조합은 세상에 없을 법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술로 재탄생한 오브제의 새로운 변용은 그녀의 의도대로 사람들게 거짓되고 은밀한 메세지를 전달해준다.
각각의 사물들은 필요에의해 제각기 부여받은 쓰임새가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그 사물이 가진 본래의 역할이 익숙해 지다보면 우리는 이내 그것의 또다른 기능과 조합에 대해서는 잊게 된다.이처럼 물체들이 새로운 존재로써 가능성을 상실하는 것과, 평범한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단편이 잊혀지는 것은 유사한 맥락으로 적용될 수 있다 작가는 인강의 감정과 욕망을 재현해내는 상징적인 오브제들의 풍경을 통해 현실에서 쉽게 잊혀지는 일상의 것들을 붙잡으려한다.  

  전장연은 주변에서 흔히 볼수잇는 사물들의 다양한 변형과 설치를 통해 평소의 삶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전혀 다른 표정을 탄생시킨다. 물건들은 본래의 기능을 잊은채 그녀의 손을 통해 약간은 어색한 상태로 탈바꿈된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못한 (지나쳐버리는 ) 평범한 일상의 감정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곧 무너지거나 쓰러질것 같은 불안전한 구조는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묘한 긴장감을 유발하기도한다.
주로 큰 물건들 사이에 작은 물건들이 끼워져 있는 설치 구조는 마치 서로 다른 단어를 조합해서 색다른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는이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맞대어 있는 두 테이블 사이로 보이는 영수증 다발과 유리판들 사이에서 그 무게를 아슬아슬 하게 지탱하고 있는 알약들처럼 본래의 기능을 무시한 조합들은 전장연 특유의 조형감각을 충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작업 과정 중에 발생하는 뜻밖의 우연과 이탈은 각각의 물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초현실적인 조각적 풍경을 제시한다.
물건이 지닌 일반적인 형태와 기능에서 시작된 서술적 상상은 상징적이면서도 은밀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며, 동시에 물체가 본래의 기능을 감추어 주체성을 갖게한다.전장연이 보여주는 오브제의 풍경은 낯익지만 낯선 조형언어로서 사물자체가 가진 폭넓은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것은 그녀의 작업이 우리는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에서 벗어나야하며 조금은 세상을 느린 시선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